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2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것들[세상의 초등학문]은 숭배[하는 지혜의 모양과]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나 육체의 기쁨[에 대한]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While they[the world regulations] have a semblance of wisdom in rigor of devotion and self-abasement [and] severity to the body, they are of no value against gratification of the flesh."
--번역, 세상의 규칙들은 헌신 자기비하 몸에 대한 엄격한 지혜의 모양을 가지나 육체의 만족에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평생 결혼해 본적이 없이 혼자 살았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Flesh gratification or flesh pleasures 육체의 기쁨을 말할 수 있었을까? 육체의 기쁨이란 창세기 5:2을 전제하는 말로서 결혼한 부부 한 몸됨의 축복을 말합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Flesh라는 의미도 똑 같습니다. 필자는 바울의 바로 저런 표현이 세례 요한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마음씀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때문이라고 봅니다.
세례 요한은 부모였던 사가랴 제사장과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났으나 가정에서 자라지 못하고 들에서 홀로 성장하며 살아가야만 했었었습니다. 누가복음 1:80. 그 이유는 누가복음 1:68-79 사가랴의 예언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법칙적 유대인의 사회종교문화사회 속에서 살아남아 물세례자로서 강자의 자리에 올랐었습니다. 자연법칙적인 힘 곧 유대인사회속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얻게 된 세례 요한의 마음가짐은 마태복음 3:4이 잘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함께 한 단위로 생각되도록 만드는 가정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힘에 의존해 살아남아야만 하는 빈들의 전통속에서 자란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서 물세례받은 자들에게 물세례가 하나님의 긍휼보다 강한 구원의 힘이라고 오해케함으로서 예수님께로부터 마태복음 11:11 받아서는 않될 판단을 받게 된 것 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이 가정 또는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력에 매우 심각한 결여를 갖게했다는 점을 주목하게 해 줍니다. 각 사람은 본래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녀 부부 한 몸됨을 이루어 살도록 정하신 바나, 세례 요한처럼 약육강식 적자생존 힘의법칙에 의해 자연화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한 몸됨의 축복을 알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러한 상황속에서 세례 요한에게 기대하셨던 바는 하나님의 축복인 한 몸됨을 추구하는 마음씀이라는 사실을 요한계시록 22:11은 하나님의 세상통치원칙으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게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하게하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게]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 계시를 체험케 해 주시고 주님의 기뻐하심 가운데 쓰임받게 되었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라바이스쿨의 입학연령인 13세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Tarsus 탈서스, 한국성경번역 다소에서 유대인 바리새파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정의 양육과 라바이스쿨시험과목 히브리학원, 생활과 직업기술을 가르치는 천막학원을 다녔었습니다. 결혼한 누나가 거주 중이던 예루살렘에서 Hillel Rabbi School 힐렐라바이스쿨에서 수학한 라바이로서, 지금의 조기유학생들처럼, 사도 바울은 혹독한 외로움과 자기자신의 나약성을 충분히 경험하며 하나님사랑하는 마음씀을 가졌던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3:16. 이렇게 이해될때만 사랑하는 자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시겠다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 바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상황이 설명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21, 사도행전 9:5.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의 문화적 언어로 말하자면 조기유학의 피폐함과 외로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허약성이 하나님의 뜻있으신 상황허락하심임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마음씀일때에만 이해 가능한 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몸부림속에서 예수님의 나타내심 즉 계시를 받게 되었고, 주님의 기뻐하심 가운데 쓰임받는 인생되었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바울의 피폐함과 외로움 허약성의 근원에는 바로 하나님의 축복인 남녀 부부 한몸됨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점에서 자신에게는 아직 허락되지 않고 있으나, 결혼생활의 기쁨을 잘 알고 사별하여 홀로된 처지의 고통도 잘 아는 누구든지 [제사장 에스겔이 겪게 되었던 사별과 재혼에 대해 언급된 에스겔 24:18, 44:22 그리고 필자가 같은 상황에서 겪으며 알게 된 바] 홀로 살게될 때 [바울처럼 미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리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육체적 고통이나 성인병을 고린도후서 12:7에서 "A Thorn in the Flesh 육체의 가시"와 "An Angel of Satan 사단의 천사"로 언급하고 있는것으로 보이며 [마태복음 16:23에서 예수님은 사단을 사람의 생각/인류의 생각이라 말씀하셨음],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에게는 허락된 아내와 함께 하는 삶"을 고린도전서 9:5에서 권리 또는 축복으로서 언급할수 있게 된 것이며, 창세기 2:24의 부부 한 몸됨의 배타적 축복 말씀에 근거한 고린도전서 7:4, 14:35을 말할 수 있는 것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아내가 자기 몸 주장[권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그 남편이 [가지]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할 권을 갖]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갖]나니[라]. [여자가]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적당함]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씀이 자기 홀로 우뚝 서려는 꿈보다 클때, 자기 자녀에게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축복된 부부생활의 기쁨과 부모의 양육환경을 통한 사랑의 토대가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을 통해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각 크리스찬도, 처하게 된 상황이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의 통치현실을 받아들이며 자기사랑의 마음씀이 하나님과 자기가 돌보도록 함께하게 된 가족에게로 향할수 있게 되어, 예수님의 요한복음 14:21 계시약속대로 주님의 나타내심을 체험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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