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라서 오늘날 우리 크리스찬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을 해 주시는 중에 (1)자기 의를 기억하게 될 자들과 (2)주님의 의를 기억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를 대비 또는 구별시켜 주셨었습니다. (1)자기 꿈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분별력을 좇아 일한 사람, 물론 이와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 곧 행위 정당화의 단위인 교회가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요한복음 5:44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던 바 공동체주의, 공동체정의론, 곧 무신론적 종교집단이기주의의 영광을 찾는 행위라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 차례 필자가 언급했듯이 신은 알려지지 않는다는 불가지론적 이슬람신학과 토대를 공유할때만 가능한 종교행동이 되겠습니다. (2)주님께서 주신 지시 곧 계시를 받아 그 비전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구별점의 핵심적 차이를 예수님께서는 불법과 지혜라는 용어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22-23, 24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라]."
전자 (1)의 경우 절대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을 할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의 = 자기의 뜻을 펼치면서 쉼 없는 삶을 살아오게 된 결과입니다. 후자 (2)의 경우 절대 자기의 의 = 자기의 뜻을 펼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사회문화 생활세계적으로 바라보면 별로 한게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아무 할말이 실상 없습니다. 그저 누구든 시켜 주시면 다 할수 있는 그런 일을 지시하시는 주님의 계시와 비전임을 생각해 볼때 한편으로는 주님 살아계심을 알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과 쉼이 구별되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10은 후자 (2)의 경우, 곧 계시받게 하시고 비전을 태워주실 크리스찬에게 창조해 주실 생활세계적 정황 상황 상태를 미리 언급해 주신 말씀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
누가복음 17:7-10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봅니다.
[1]주님의 식사시간을 지켜 본대로, 주님의 식사시간 이후에 종의 식사를 하게 되기 원하는가? 이러 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전건: 주님의 명령이 있는 종인가 = 주님께서 계시와 비전을 태워주셨는가? 또한 주님의 지시하심대로 다 행하였는가?
후건: 주님의 식사시간을 보아 알고 있는가? 주님께서 식사시간을 가지라 명령하셨는가?
* 식사습관으로 언급하신 예수님의 표현은 기대거나 누운 자세로 편안히 식사하는 유대인의 당시 식사시간 모습이었습니다. 유교적 전통에서 살아온 중국 한국 일본 비엣남은 문화적 제사의식형태를 일상화한 모습이므로 그 구별점은 본대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케 해 줍니다.
[2]주님께서 명령해 주실 식사시간 =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식사시간입니다.
요한복음 4:34, 5: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3]주님께서 주신 명령대로 다 행한 후에 무익한 종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식사시간 = 계시비전 있는 크리스찬의 식사시간입니다. 그 내용적인 측면의 핵심점은 식사시간 = 사회문화 생활세계적 휴식의 모습 = 주님께서 시키신 일 = 양식입니다.
요한복음 14:21, 17:2을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의 현실성이 위와 같이 휴식인지 일인지 분간되지 않는 인생되게 하시는 주님의 계시와 비전태워주심에 대한 체험없이는 이해될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주님 사랑의 마음씀을 일상화하는 의식적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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