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을 체험한다는 게 무엇일까요? 필자는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만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교시절 집에서는 말로 할 수 없는 육체적 핍박을 삼년여 겪어야 했었고, 교회에서는 예상치 못한 영적 직업세계에 대한 일종의 초청장을 받았었고, 필자는 자주적 결단을 생각하며 통행금지를 무시한채 밤과 새벽에 교회의 개인기도실에서 상당한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주님의 심부름을 받은 분을 통해 알 수 없는 말씀을 전해 받고 마음 깊은 곳 한 가운데 놓고 살게 되었었습니다. 인생포기를 의미한다고 생각되는 신학을 하기로 마음먹고 첫 등록기간부터 도움주겠다는 분의 마음을 돌이켜 놓으신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어찌할 수 없는 황당함과 말문이 막히는 현실의 벽 앞에 서게 하셨었습니다. 그때 저 마태복음 5:3 말씀 속의 심령이 가난한 자 된 필자의 모습을 해석해 보려 노력 중에 많은 서양 문학적 사상가들의 체험적 글들을 접하게 되었었습니다. 이게 심령이 가난한 거지! 이러면서 말이죠!
인생포기 후의 인생을 살며 겪게되어 온 사실들은 물리적 욕망을 포기하거나 물리적 관계를 단절해서 가난해 지는게 아니라는 해석을 필자에게 갖게 했습니다. 자기 욕망과 상상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관계를 단절하고 갇혀 사는 일종의 욕망보존적 평안은 잠시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경우일 뿐이죠! 인생의 발을 세상으로 내 딛으려는 순간 깨어지기 쉬운 평안의 욕구일 뿐임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인 도스토예프스키도 필자도 저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의 의미론적 해석이 매우 허약한 것 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다는 신호를 자연현상의 기적을 통하여 필자에게 나타내실 때에도 필자에게 그 사실이 평안이라기보다는 안심되는 기쁨뿐이었습니다. 필자는 생각되는 계획을 살아가는데, 동시에 주님께서 지켜봐 주고 계시면서 그 사실을 예측 못할 방식으로 나타내 주셔서 안심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하지? 뭔 뜻일까? 알 수 없지만, 동행해 주시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찬양을 많이 불렀고, 함께 찬양했지만, 주님의 평안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필자가 겪었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남성을 향하신 주님의 평안]
필자는 조강지처를 사별하면서 겪게 된 일들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욕망도 포기하고 단절하였었고, 관계도 아주 조그마한 마음만큼만 열어 놓았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삶을, 두려움 속에서, 필자를 잘 아시면서도 원하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단호한 명령만 내리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와 허약성에 대한 종의 두려움, 마음도 아실터이니 생각도 포기하고, 마음의 움직임도 닫아 버렸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니까요!
육년을 지나면서 보니, 그때 주님께서 말씀도 주시고 해서 명령대로 움직여 사는 종되었고, 비전을 보여주셔서 마음에 담고 또 할바를 생각케 되었고, 주님마음 의도 알기 위해 하루하루 살게 하셔서 주님종의 인생에 갇혀 살게 해 주시니, 이제 주님의 평강은 계시없이 얻을 수 없는 선물임을 고백하고 설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같은 상황을 먼저 겪었던 주님의 제자들 상황에 대한 말씀을 평강체험으로 읽어 봅니다. Peace shall be experienced only in Jesus' appearance. 평강은 주님의 나타내심에 의해서만 저절로 체험되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Shall은 누구도 그 상황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체험 앞에 서게될 때만 사용하는 동사표현어입니다.
요한복음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성을 향하신 주님의 평안]
평강을 깨는 것은 용서가 않될 때 입니다. 주님이 항상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와 긍휼을 기억하며 사는 크리스찬은 어떤 것도 주님관계보다 더 가치 있는 생각이 없게 된다는 말씀이죠! 교회를 위해서 주님관계를 잊게되면 평강이 깨지겠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셨다면, 참 어리석고 멍청한 이런 사람이 아직도 있는지? 사역의 목적이 주님께 봉사하는 주님의 종이라는 고백은 실상 저런 사람의 경우엔 거짓말이 분명해 지겠죠? 평강은 주님보다 뭔가 더 앞선 욕망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온 교회가 두려워할 수 있는 일을 겪으면서 어떠했을까요? 사도행전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 했다는 사실을 안 베드로가 자기 앞에서 죽어가는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평강이 깨어지고, 주님 앞에 벙벙해지는 순간을 겪었을 것 입니다. 산 하나님이 펼치시는 사역 앞에 베드로는 두려웠을 것 입니다. 주님 이렇게 까지 하시나요? 필자는 결코 베드로가 저 때 평강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주님의 평강 깨어짐과 교회세우려는 욕망의 발견이 얼마나 그를 당혹스럽고 혼란스럽게 했을까요? 베드로는 결국 육망의 닫힘 곧 교회대표자리 내어 놓음의 시작점을 예측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평강은 욕망의 닫힘으로부터 올 수는 없고, 다만 그 일로부터 주님의 인도하심을 겪게 됩니다. 주님의 평강은 주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 항상 동행하고 계시는 임마누엘의 은혜와 긍휼을 체험케 해 주시고 또 그때 주시는 명령을 받을 때 겪게되는 신비한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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