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T67 신명기6장7절

신앙의 새 발견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씀을 시각화합니다! 자세히보기

성경성구/잘못인용되는성구

문화적 오류 바로잡기 [은혜와 긍휼, 성경의미를 압시다!]

신명기6장7절 2018. 2. 16. 23:07

***

한국의 유교문화적 접근이 성경말씀에 대한 오해와 용어사용의 오류로 문제적 상황에 와 있는 대표적인 두 단어를 살펴봅니다. (1)은혜라는 말을 한국 교역자사회에서 확정된 또는 받아들여진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는데, 이는 경쟁제일주의적 문화 속에서 위계질서적 권위를 세우기 위한 용법으로 은혜라는 말이 잘못 쓰여지고 있는 바, 현실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라 할 수 있습니다. (2)긍휼이라는 말을 비난받을 만한 일에 대한 암묵적 비난 자제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는데, 이는 경쟁적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정치기술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라 할 수 있습니다.

     자, 성경에서 은혜와 긍휼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출애굽기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은혜와 긍휼을 말씀하십니다. 마땅한 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신다. 서양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정의 JUSTICE에 대한 고전적 정의 definiton입니다. 받을 만한 자에게 받을 만큼 그 몫을 주는 게 정의라는 말씀!

     앞서 말한 한국 설교자들의 오류해석을 저 출애굽기 33:19 말씀에 적용하면 이렇게 되겠죠? 시험을 보고 그 심사위원에게 받아들여진 자에게는 은혜가 있는 것이다. 합격이 곧 은혜다! 시험을 보고 떨어질 사람에게 턱걸이로라도 합격시켜 줘 그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는 긍휼이 있는 것이다. 비난받을 실패상황에서 겨우 체면만이라도 유지시켜 주는 정치적 기술이 긍휼이다! 이 한국적 성경해석의 오류 문제상황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꾸중하신 장면 아닙니까? 요한복음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한국적 오류해석을 멈추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만 할 말씀을 봅니다. 이사야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와 긍휼의 뜻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1)은혜는 하나님께서 행동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심을 뜻합니다. 잠잠히 보고 계시는 상황이 은혜입니다. 우리 사람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기다릴 수 있게 해 주실 때 은혜라 말할 수 있겠지요! (2)긍휼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동하심을 뜻합니다. 일어나셔서 뭔가 개입해 주시는 상황이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재림하시는 이 세상 종말 때에 힘센 천사를 보내실 때 보호받게 될 대상 속에 포함된 크리스찬에게 적절한 성경적 표현어가 바로 이 "크리스찬에 대한 긍휼"입니다. 우리 사람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불의에 대해 그리고 아픔에 대해 일어나 정의 편에 서게 해 주실 때 또는 아픔을 어루만져 안아 줄 수 있게 해 주실 때 긍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손영진 사모님 찬양] 그림 클릭

 

 

     다윗이 바로 이 긍을 알고 바로 그 말을 꼭 맞게 사용합니다. 시편 4:1 "네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5:7말씀은 출애굽기 33:19에 대한 패러프레이즈 (바꿔말하기)에 해당하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 크리스천이 한국문화 앞에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살고자하면, 곧 "은혜"와 "긍휼"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해 주심 체험과 하나님 천사가 일어나 내 손을 끌어 당기시는 일 보는 체험임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은혜와 긍휼 체험에 대한 야곱의 예를 보면 산 하나님체험의 현실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32:1-2, 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했다.]" 야곱이 문장의 주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자들도 주어로 위치되어 있는 문장구조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을 만났다 곧 하나님체험 은혜를 말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기다려 왔다는 전제를 놓치면 이른바 이신론적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체험한 야곱을 말하고 있는 문장구성법 인 셈입니다. 긍휼의 구조는 천사들을 통해 꼭 마찬가지의 이미지 구성을 야곱이 자기 가족과 재산이동에 적용하게 된 사연 설명방식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하나임 체험의 천사가 야곱을 이끄는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통한 야곱에 대한 긍휼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일어나 내 손을 끌어 당기시는 일을 보게되는 체험에 대한 보다 생생한 모습은 요한계시록 10:11 천사를 통한 하나님말씀 전달 장면에 나옵니다. "저가 [누군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요한에 대한 은혜와 함께 체험되는 긍휼이 우리가 오관이라 부르는 통로를 통한 인식체험과 구별되지 않는 신비영역적 체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가 내 손을 이끌어 긍휼의 도구로 쓰임받게 되는 신비체험이 긍휼 체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