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욕망에 기초된 설교자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가? 명분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살펴 보기 보다는 성취된 결과를 전시물처럼 향유하는 방법을 형상화하는 방법을 찾는다. 주님께서 살아 계신지,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이게 아니고 자기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기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다 따라와! 이런 지도자상을 표준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마곡 땅의 곡처럼 야망의 지도자가 된 설교자는 천상의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불못의 재가 될 때 함께 섞여 영원한 고통에 참여할 어리석은 명목상 크리스찬을 가능한 한 많이 모으고자 한다. 그 허상을 외치고 시각화하여 수만 수천 명의 교회를 이루어 설교자의 비극을 생산해 낸다. 그 중 대표적인 오류 해석 말씀 즉 잘못 인용되는 성구가 여기 있다.
로마서 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의 해석적 전거는 로마서 10:3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어떻게 잘못 인용되고 있는가? (1)주님의 구원보다 사람의 믿음이 우선이라 말한다. (2)사람의 복음전도가 그 사람을 주님께서 보내신 자와 동일시 한다. (3)복음전파의 무조건적 선 즉 우선성을 말한다. (4)사람이 주님을 믿고 호명하면 구원이라는 공식화된 구원교리가 있다고 말한다. (5)구원의 주님 이실지라도 스스로 말씀하신 내용에 의해 구속된다고 말한다. (6)교리적 이해가 신과 인간보다 힘이 세다는 마음가짐을 칭찬한다. 칭찬과 찬양은 영어로 같은 단어 Praise이다. 결국 오리석고 무지하고 세상 성공 욕망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하나님 이름을 빌려 사람의 행위를 찬양하는 셈이라!
어떻게 고쳐야 할까? (1)하나님의 말씀을 맥락 속에서 시공간적 의미파악을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시대적 생활세계를 현재적 관점에서 고려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인류에게 동일한 생활세계적 상황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볼 수 있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2)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과정에 대해 단계적 시각화법을 기술하고 있는 바울의 마음 속 체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안디옥교회 기도 중 특히 바나바 선지자를 통해 보내시는 신호를 보내셨던 것처럼 보내심 즉 성령의 소명과 사명이 있어야만 그 다음의 시각적 현상이 의미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크리스찬은 명목상 크리스찬이 아니다. 주님을 이미 만난 체험이 있는 크리스찬이 주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를 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4)구원의 길은 누구든지 동일한 과정이나 방식으로 성취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누구든지 라는 표현은 개별적 크리스찬의 체험적 주님 만남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한국 교회가 이제, 선대 설교자들의 무지와 국가경제발전론에 경도되어 잘못 욕망 성취의 방법으로 해석한 말씀들을 바로 바라보아야 할 때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 하시기 전에 "보라!'하시지 않았는가? 자기 욕망을 시각화하는 일을 생각하지 말고,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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