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T67 신명기6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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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성구/잘못인용되는성구

잘못 인용되는 성구들 [눅 14:23 강권, 마 11:12 침노, 경고말씀]

신명기6장7절 2018. 7. 1. 16:45

 

왜 살아계신 주 하나님께서 한국어 성경번역자들을 통해 원문에 없거나 의미론적으로 반대되는 번역어를 삽입 또는 애매하게 번역토록 하셨을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마음에 악한 자는 이미 그 악행의 상황을 통해 자기 열심을 더 낼 것이요, 악을 보고 멀리하고자 하는 크리스찬은 창조주 하나님의 첫 사건에 비추어 의문을 품게 되어 사실을 확인하려 할 것이며 곧 주님 마음에 기뻐하심을 받을 결단을 할 것이기 때문에, 번역어의 오류문제는 주님의 심사표에서 보자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으므로 그들 사회문화적 정서대로 놔 두신것이다!

 

     한국 교회의 역동적인 자기꿈을 이루기 위해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교회부흥의 기치를 걸게 했던 복음서 번역 오류와 무신학적 곡해 설교와 크리스찬의 일그러진 상의 근원 구절들을 봅니다. [필자의 한국어 번역은 Translated from the Original Language with Critical Use of All the Ancient Sources 모든 관련 고대원전들을 참고한 성경원전언어를 영어로 번역한 The New American Bible 더뉴아메리칸바이블의 St. Joseph Edition 세인트조셉판 영어본문을 사용하였습니다.]

 

(1)누가복음 14:23은 강권하여 또는 억지로라는 원문에 없는 삽입구*로 한국 교인들의 잘못된 복음전도관을 갖게 해 왔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이 삽입구에 경도된 교인들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스바냐 1:9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폭력과 거짓으]로 자기[들]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창세기 3:6의 이브와 아담이 범한 잘못은 짐승, 뱀의 형상대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폭력에 있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론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3:8에서 바울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 또는 의를 드러내게 한 행동이라도 불의를 행해서는 않된다는 점을 잘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바울은 사람의 근본적인 죄 또는 악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힘 능력 실력 그 어떤 것을 하나님 뜻에 대항하여 행사하는 폭력에 있다는 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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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14:23 그리스원문 누가복음 14:23.

 

Luke 14:23 in Greek. 그림을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Complete Jewish Bible 컴플릿주이시바이블
Luke 14:23 "The master said to the slave, 'Go out to the country roads and boundary walls, and insistently persuade people to come in so that my house will be full.'"

New American Bible 뉴아메이칸바이블 [The New American Bible, St. Joseph Edition]
Luke 14:23 "The master then ordered the servant, 'Go out to the highways and hedgerows and make people come in that my home may be filled.'"

 

     Anagkason in Greek 그리스어 [기본형 anagkazo 아낭카조] 아낭카손은 Jewish Christians 유대크리스찬들이 위 본문에서 (1)insistently persuade 인시스턴틀리 펄스에이드 지속적으로 설득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2)Luke 14:12-13 누가복음 14장 12-13에서 자기를 초청한 자에게 주신 말씀 중에서 phonei 포네이라는 동사 [call or invite 부르다 또는 초청하다]를 사용하신 후 위 본문 말씀 중 anagkason 아낭카손이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계셔서 그 의미가 (3)강제 또는 폭력성을 함축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위와 맥락을 같이하는 선상에 있는, 마태복음 11:11-12은 설교적 곡해를 이끌어 오고 있는 말씀으로 한국 교인들에게 잘못된 구원관을 갖게 해 왔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후반절의 적절한 번역은 "천국은 폭력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나니 그 폭력이 힘으로 천국을 빼앗고 있는 중이라!" 폭력으로는 결코 하나님나라에 들여 보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엉뚱하게도 정 반대의 논조로 설교하고 또 듣는 자들은 성공제일주의를 마땅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비극이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20:25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 폭력이 하나님 모르는 자들의 편에 속해 있는 상징행동임을 말씀하셨음을 상기케 해 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아느니라]." 침략 노략하여 얻은 것은 자기 것 될 수 없다는 간단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우리 주님의 뜻, 예수님의 뜻은 결코 주신 힘 능력 실력 또는 그 어떤 것으로 열심내 뭔가를 성취하며 살라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종은 주 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머물러 삽니다. 하물며 사람이 누구에게 강권하여 또는 억지로 뭔가를 시키고자 할때 "폭력"자 되는 일이 주님뜻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게 주님께서 시키신 일이신지요?" 주님의 동일하신 대답은 "먼지 털고 떠나라!"는 것이죠. 이를 가장 잘 실천한 다윗의 모습을 기억하면 결코 폭력을 가까이 하며 살 수 없음을 잊지 않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무엘상 24:12-13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