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문화적 풍토 속에서 근본적으로 큰 오해를 불러 일으켜온 성경해석과 잘못 된 크리스찬 지향상의 뿌리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준비하는 자를 쓰신다" 말하는 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인 결과인가? 이게 맞다면 알미니안-웨슬레안 결단으로서의 믿음론에 위기가 없을 것이요, 더 나아가 지식 돈 능력의 혜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세상사가 아주 쉬울 텐데, 저들 중 하나만 있어도 성공은 아주 쉬운 일이 아닌가? 이게 맞다면 천국은 사람노력과 능력과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되리라, 과연 그런가? 칼비니안 성직관도 저 알미니안-웨슬레안 믿음결단과 꼭 마찬가지로 현상학적 근본 오류를 갖고 있지 않은가?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 수 있다는 뜻으로서 저 말씀을 받아들이는 오직 한 가지 경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바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만 가능하다. 이는 성경에 대한 오류 해석일 뿐이다. 피조물의 창조주화가 가능하다고? 피조물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어떤 삶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폭력행사요, 이브 아담처럼,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하사받은 능력을 자기 마음 뜻에 따라 행사하는 삶도 죽음을 향한 돌진, 창 2:17 말씀처럼 곧 망하는 길이라 말씀하신다.
"대장부" 그리고/또는 "여장부"는 이른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따라, 자기 결단과 직분을 따라 세움받고 이 유한한 세상에서 역할을 갖게 되지만 그 결국은 망하게 되어있다 말씀하신다. 대장부 그리고/또는 여장부를 추종하며 살아가는 자들도 "하나님 원수에게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 곧 "가라지들" 속에 속하여 꼭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어 있다 하신다.
잘못 인용되는 성구들 [겔 38:7]
"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대장이 될찌어다."
이 말씀은 대장부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신다. 겔 38:1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올 때에]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 [일어나게 되]리라." 사 28:22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비웃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 [단단해 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 눅 17:29-30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계 20: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니라.]" 자기 결단으로 대장부되는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며 그 결국은 세상 종말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자라는 말씀이시다.
왕상 2:2-3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 다윗이 솔로몬에게 말하는 저 대장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영혼과 마음과 몸, 그 어떤 자기 것으로도 결단하거나 자기 직분을 지키는 일에 우선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할 때마다 가졌던 마음은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의 호흡으로서의 영혼, 하나님말씀을 지키려는 마음 곧 주님의 마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몸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뜻을 찾아 나서는 낮은 섬김이 그 핵심이었다. 자기 마음의 결단도 왕의 직분도 아니고, 오직 그 모든 것들보다 앞서 갖게 되는 마음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다윗이 말하는 대장부이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은 다윗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창조얘기도 믿지 않았다! 창 2:17, 3:6 선악과 열매 먹은 결과, 선악분별력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짐승같은, 곧 뱀의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한 탓일까? 왕상 3:25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산 아들을 둘로 나눈다는 표현, 저 짐승 (뱀)의 약육강식 자연법칙의 일종, 정치적 지혜의 잔인함이 솔로몬에게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고 성경이 말씀하신다! 이른바 저 "솔로몬의 지혜"는 정치적 짐승된 왕의 모습을 표상한다.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라]." 개들의 떡 부스러기, 개들에게도 돌아가는 떡 부스러기, 이 사회복지정신은 현대 사회복지법과 정책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뭔 말인가? 현대인에게 저 솔로몬의 지혜는 현대 사회복지정신보다도 열등하다는 점이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응당 솔로몬이 맞닥뜨린 저런 상황에 대한 해법이 국가의 입양 양육 시스템이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마 6:2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은 솔로몬이 취한 자기 결단과 직분에 대한 충성이 오직 하나님의 통치만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식물보다 못하다 말씀하신다. 세상의 타락한 짐승법칙을 따라 사는 누구도 천국에 없다, 선악지식이 솔로몬을 짐승되게 했고, 그를 천국에서 발견할 수 없게 했다는 말씀이다.
사 45:1, 5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고레스는 왕의 직분을 받으나, 그는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무지의 선행, 곧 하나님을 모르고 무지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 뜻에 따라 쓰임받는 자가 된다 말씀하신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단 7:17-18 "그 네 큰 짐승[들]은 네 왕[국]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왕의 신분을]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다니엘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체험케 된 비전과 계시를 통해 깨닫게 된 것, 곧 자신이 그동안 정치적 짐승의 삶을 사는 왕의 직분자들에게 봉사해왔다는 사실과 그 결국이 유한성이라는 사실, 그동안 죽음을 향해 돌진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점은 소위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선행"이란 구원에서 멀리 있다는 뜻이라는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기다리며 그 뜻대로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찾는 자 외에는,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 외에는 주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이 없다!
롬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마 19:17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무지의 선행에 대한 이해의 핵심은 자기결단에 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각인된 양심에 따라 살았다는 의미는 자연상태 자연법칙적 짐승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의 저 말에 대한 종교다원론적 오류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학술적 교양의 결핍과 선교신학적 주석의 실수에 근거한다. (1)마 25:34, 37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주여!" 주님의 종들에게 형성된 양심과 문화인의 양심 사이의 거리를 주목할 일이다. (2)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저 롬 2:14-15에 대한 현상학적 양심 선행론과 이 문화선교사역적 의미론을 바울의 렘 31:33에 대한 의미확장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바울의 비밀에 대해 무지할 때이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스라엘 곧 하나님 백성에게 새 마음주심과 하나님 모르는 사람의 양심 사이의 거리를 놓치지 말아야한다. 계 20:4은 사도 요한을 통해 주님나라 백성에게 있는 하나님사랑의 공통성을 이렇게 말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라.]" 대장부 여장부의 자기비전을 사는 삶, 무지의 선행, 천국을 향한 길이 아니다.
대장부 그리고/또는 여장부의 길을 멀리할 수 있는 삶을 생각해 보자! (1)사람의 종은 곧 짐승에게 봉사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주께 봉사하는 피조물은 어떤가? 주님의 종! 마 23:10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2)주님의 공중재림을 믿는가? 세상문명과 대장부 여장부에게 정신무장 당하였다면, 불속에 던져질 가라지들의 무리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눅 17: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소금기둥은 바다가 사라져 없어진 하나님나라에 없다는, 계 21:1 말씀을 주목하라 하신다. (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말은 무얼 의미하는가? 요 5:44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찾는자"라는 말씀 속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피조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우리 주님께로부터 오는 비전과 계시 없이 불가능하다! (4)주님은 전지하시다. 모든 사람의 중심까지도 아신다. 그런데 다 아시는 주님께서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면 어찌하라 하셨는가? 마 6:32-33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필요한 것을 받기 위해 선행하는 일로서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뜻을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지식의 눈이 아닌 주님의 창조의도가 사랑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피조물 창조보다 앞선 하나님사랑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길이라는 말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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