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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종교는 사회학적 교회역할론이나 크리스찬이미지에 주목한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마태복음 5:16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에 대한 사회기능론적 해석과 복음화론에 대한 접근의 결과가 기독교사회참여론과 홍보론을 낳았다. 문제는 이런 접근법과 현상이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말씀침해라는 사실이다.
자, 우선 번역어에서 오는 오해의 소지를 짚어본다.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KJV 킹제임스벌젼 RSV 리바이시드 스탠다드벌젼은 그리스어 신약원어성경의 "카라 에르가 KALA ERGA"를 Good Works로 번역하고 있고, NAB 뉴아메리칸바이블은 Good Deeds로 번역하고 있다. "착한 행실"은 마태복음 19:17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는 말씀을 생각할때 "선한 행실"로 번역되는 게 마땅하다. 하나님말씀에 따르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2) 이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교회와 크리스찬의 홍보적 전도활동을 명백히 경고하셨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즉 천국복음을 가진 크리스찬의 하나님뜻에 따르는 행동이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사회학적 교회론은 이 점에서 자기홍보론을 통한 복음화주장의 근거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주 쉽고 간결하게 말하자면, 사회학적 종교론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신학에 근거한다. 이는 다시 신은 알 수 없다는 이슬람신학에 뿌리를 둔 것이다. 신의 뜻을 알 수 없스므로 그 대리자를 자처하는 공동체가 신을 대리한다는 주장을 한다. 공동체정의론의 논리적 언사가 그렇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크리스찬이라면 어떻게 선한 행실의 주체가 사회 또는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와 크리스찬의 주체는 "하나님 아버지" 아니신가? 기독교는 개인이거나 집단이거나 간에 사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행하시는 관계회복의 종교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믿는 구원종교이다. 누가 "모든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성경 첫 머리의 말씀을 부정하고도 그리스도의 교회요 크리스찬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교회와 크리스찬의 중심에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교회와 크리스찬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을 지켜사는 이유다. 하나님말씀을 부정하지 않는 한국교회와 크리스찬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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