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관원 이었던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복음 9:9. 마태는 시비걸어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가서 배우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기의 즉각적인 반응이 예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랑 방식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마태복음 9:13.
바리새인들 너희들은 "가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2:17과 누가복음 5:31에서는 누락되어 있으나, 당시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 있던 마태는 그 말씀의 뜻을 깊이 그리고 중요하게 받아들여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가라!" "가서 배우라!" 하시는 말씀을 하실 때를 맞닥뜨리는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예수님께서 사랑없음을 보시고 물리치시는 상황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저 "가서 배우라"는 말씀을 마태가 주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을 "절대로 떠나서는 않되고 즉시 고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사랑방식 때문에 가능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2:17과 누가복음 5:31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라"는 표현이 누락되어 있는 점을 통해 그 비교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배우라 하신 내용은 호세아 6:4, 9에 언급되고 있는 바 제사장무리의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제사빌미 강도행각을 떠나 하나님사랑을 배우라는 뜻임을 알수 있습니다만 본 글에서는 논외로 합니다.)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저 "가서 온전한 사랑을 먼저하라"는 말씀을 마태가 "떠나서는 않되고 즉시 사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해야할 이유는 "하나님 외에는 선한이가 없다"하신 예수님의 전거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대상이 수단처럼 바뀔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않된다는 마태의 이해와 표현법이 오해를 줄일수 있는 잇점이 있습니다. 이점은 마가복음 10:21과 누가복음 18:22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양화해석 즉 "부족한 사랑"과 "부족한 순종"이라고 오해케 하는 가능성을 줄여주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저 "가라"는 표현을 떠나는 행동으로 받는다면 예수님 없는 사랑, 형식 또는 행동론으로 잘못 해석하는 게 될것입니다.
마태복음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저 "가라"는 표현을 주목하고 있는 마태의 예수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시 고치라,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없다!" 사랑은 마태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즉시 반응하여 "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지 않도록 마음써 살아가며 상황을 넘어서는 인생을 살게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크리스찬의 사랑은 즉시 반응하는 사랑을 말하며, 예수님을 결코 떠나지 않는 마음씀과 결단을 통해 체험된다는 사실을 마태를 통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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