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T67 신명기6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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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행동주의 믿음론 [바울의 현상학적 비판, 갈 1:11-13]

신명기6장7절 2020. 10. 4. 05:16

어떤 과정을 성취해 본 사람은 그 성취로서 얻을 수 있고, 새롭게 보이는 많은 것들이 예전에는 도무지 상상도 할수 없었던 것들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로부터는 이 세상 살아가는 일이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다는 사실을 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살아갈 생활세계적 설계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성경에서 찾아 자기 합리화에 들어갈때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Judaism 유대주의 또는 Jewish Behavioral Faith 유대교 행동주의 믿음론입니다. 보다 정확한 서양의 학술용어로 말하자면, Orthopraxy 바른행동론입니다. 그 원형은 창세기 22:1-12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경외 사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게 안주려 하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12.

 

아브라함처럼 인정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이 세상 사는게 누워 떡먹기야! 보라구, 창세기 22:13-14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보실 것이]라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행동주의 믿음론의 현상학적 문제를 공동체주의와 배타적 또는 호전적 종파주의에 뿌리박은 불신앙이라고 경계시키셨습니다. 공동체주의는 이사야 41:4-7에 이미 예언으로 경계케 해 주셨던 공동체주의 우상을 회피해야 할 것을 재차 말씀하신 요한복음 5:44을 통해 전해 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지시하심이 아니라, 공동체결정이나 성경말씀에 대한 공동체의 해석적 모델을 따라 살아 공동체로부터 칭찬받는 일과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을 동일시 하는 어리석음을 불신앙이라 하신 것이죠! 모세를 통해 일시적으로 허용하셨던 유대교 눈은 눈, 이는 이로하는 행동준칙 즉 유대교 행동주의적 종파주의의 불신앙 현상의 표상적 근거로 볼수 있는 출애굽기 21:24은 예수님께서 크리스찬이 회피해야만 할 생활방식으로 정정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형태의 종파주의나 분파주의도 산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공동체주의의 정치적 결정에 경도되었을때 나타나는 불신앙 현상이라는 점을 주의시켜 주신 것이죠!

 

유대교 행동주의 믿음론 또는 유대교 바른행동론은 어찌하여 근본부터 잘못이라는 말씀일까요? 아브라함의 믿음행동을 유대교적 바른행동론으로 해석 받아들여 이 세상을 살아가면 않되는 이유가 무얼까요? 좀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왜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얻게 될 하나님나라 구원이 없는걸까요? 이렇게 질문을 변증론적으로 표현해보면 그 뻔한 답이 나오지요?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으로도 구원을 얻을수 없다는,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신학적 신앙적 천국구원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같은 유대교 행동주의 믿음론으로 바리새파아버지에의해 양육되어져 살아왔고, 13세에 유학하여 예루살렘 라바이스쿨 가말리엘 밑에서 성직교육과정을 마친 후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저 유대교 바른행동론을 따라 열심을 내어 살아왔으나, 그가 살아온 인생이란 게 온전히 사회문화적인 집단이기주의의 한 현상 곧 공동체주의의 창작 믿음론에 종사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정치적인 짐승에 봉사한 것입니다. 그 전회는 산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바울에게 나타내시며 비전과 말씀과 지시하심을 주셨기 때문에, 그 신비한 계시를 체험한 일 때문에만 가능했다는 사실을 갈라디아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11-1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창작]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였었느니라].

 

바울이 전하게 된 복음은 모두 산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내용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처럼, 사람들의 공동체결정도 아니며, 학술적으로 도달된 어떤 해석적 교리도 아니고, 유대교적 행동주의 현상을 재현하거나 새롭게 창안 생산해 낸 아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공동체적 복음이란 실상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슬람신학의 불가지론적 불신앙에 다름아니게 되며, 교리설파 또는 저때의 복음전파라면 공동체적 유익추구를 위한 정치활동 외에 다름아니게 되고, 행동주의적 발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스스로 속임당하고있는 우매한 자기꿈쟁이외에 다름아니게 됩니다. 이러한 유대교적 바른행동론 현상의 문제점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케 된 주님의 계시 때문이라 말하고 있는 점에 크리스찬은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유대교 바른행동론이 맞다면, 뭔가 성취점에 도달한 인생은 아주 편할터인데, 그게 전혀 그런게 아닙니다. 유대교 바른행동론에 경도된 많은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Orthodoxy (올쏘독씨 = Right Opinion = 바른 의견이라는 뜻인데, 정통이라고 정치적 오류번역과 주장을 펼치고 있는 상황) 외침이 이젠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이들의 주장은 실상 바른행동믿음론 외에 다름이 아닌 정치적 의미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오해일뿐입니다. [ Orthopraxy 올쏘프락시와 Orthodoxy 올쏘독시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필자의 책 제 6장 히브리의 신화와 종교 및 제 7장 로마의 신화와 종교를 참고 바랍니다. 차충호, 신화와 종교 서울: 한국문화사, 2005.]

 

사도 바울이 체험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크리스찬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뜻을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운데 요한복음 14:21 약속말씀대로 체험되는 계시사건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음을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