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이 포로생활 중에 정치적 출세의 외양보다는 하나님사랑하는 마음씀으로 인해 겪게 되었던 현실상황에 매우 민감했었다는 사실은 다니엘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이유를 요한복음 14:21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사랑, 예수님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니엘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계시는 언어와 이해력을 통해서 계시받은 자 곧 선지자의 인생을 이끄십니다. 그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례가 다니엘 9:21-23, 10:1에 나옵니다. 필자가 주님의 계시 베푸실때 일어나는 언어적 현상과 이해력 인식현상을 이제라도 상세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서 필자에게 아내사별과 동시에 그 일들을 겪기 시작하게 하셨고 또 그 이전과 이후의 필자인생 여정을 통해 내내 깨닫고 고백케 하신 사실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금번 주제인 계시 언어와 이해력은 사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4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밖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 또 필자도 여러 번 언급을 회피해 왔었으나, 이 세상 최고수준의 철학과 종교지식인들과 함께 뉴욕 등에서 학위과정을 밟으며 겪게 되었던 사실들과 필자의 여러 차례의 주님의 긍휼베푸심에 대한 이해력 감사 고백을 배경으로 갖고 있는터라 그 핵심적 설명력을 주님께서 기뻐하실 인생 살고자 하는 크리스찬을 생각하며 이 시간을 열고자 합니다.
계시는 말로서 이해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음파나 사운드가 없는 말 또는 언어를 주님께서 창조하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대상은 앞서 말한 하나님사랑, 주님사랑, 요한복음 14:21과 같고, 이는 다니엘 9:23에서도 "사람의 모양"이라는 뜻을 다니엘이 "가브리엘"이라 이름한 천사의 말 또는 언어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너는 사랑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니라." 현대철학 또는 현대심리학에서도 일반화되어 있는 바, 통속의 두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 입니다. 주님께서 보내는 계시 언어는 분명히 그 계시 받는 자에게는 음파도 사운드도 없으나 자기에게 심겨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해서 알아듣게 됩니다. 계시언어는, 이런 면에서 필자는 "심겨 주신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 오관의 세계에서 청각을 통해 인식된다고 밖에는 우리 사람이 표현할 수 밖에 없으나, 바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말" 또는 "신비한 언어를 심으실때" 계시 언어가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상상은 얼마든지 쇼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무언가 자기가 원하는 바를 떠올리며 심겨졌다고 느껴야 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것 입니다. 이러한 상상은 스스로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셔서 절대 피해야만 하겠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때, 전혀 알 수 없는 일을 겪게 하시면서, 아 주님이시구나! 계시는 주님의 때, 주님의 방법, 주님의 의도가 있을 뿐 그 계시를 받는 사람은 전혀 뜻 밖의 놀라움일 뿐입니다.
사람의 언어 또는 말에 대한 이해력은 학습능력에 따라 깊이와 속도 폭 등이 달라지고 경쟁적 지식의 우열에 민감하게 평가됩니다. 주님의 계시 언어는 계시 받은 자로서는 당장 알 수가 없습니다. 계시받은 자를 위한 언어가 아니고, 주님의 뜻을 알려 주시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도도 의미도 반응과 결과도 알 수 있다면 그건 자기 언어일 뿐인거죠! 계시 언어는 뜻 밖의 주님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온 인생을 건 학습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니엘 9:21-23, 10:1이 잘 보여 줍니다. 한 마디로, 계시 언어에 대한 이해력은 계시 받기 이전부터 그 이후로까지 주님께서 학습과정을 통해 심어 놓으신 지적 로드맵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속에서만 깨닫게 되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의 결과임을 알아 차리게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주님의 계시 언어와 이해력이 주님께서 심어주시는 긍휼임을 깨닫고 감사 고백하게 하시는 크리스찬 인생의 신비를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시면서 다니엘 9:21-23, 10:1을 읽으며 주님 사랑을 향한 마음씀을 여시는 크리스찬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 9:21-23, 10:1
내가 [이 기도로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는데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내게 이르더니 내게 [이 말로] 가르치며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이해력]을 주려고 나왔나니 네가 [간구]를 시작[했을 때 내가 발표하러 올 답이 내렸도다 너는 사랑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니] 그런즉 [그 응답을 표시하고 그 비전을 이해하거라], 바사 왕 고레스 삼년에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계시가] 나타났는데 그 [계시가 확실하니] 큰 전쟁이라 다니엘이 그 이상[으로부터 계시를 이해했도다].
Daniel 9:21-23, 10:1
I was still occupied with this prayer, when Gabriel, the one whom I had seen before in vision, came to me in rapid flight at the time of the evening sacrifice. He instructed me in these words: "Daniel, I have now come to give you understanding. When you began your petition, an answer was given which I have come to announce, because you are beloved. Therefore, mark the answer and understand the vision. In the third year of Cyrus, king of Persia, a revelation was given to Daniel, who had been named Belteshazzar. The revelation was certain: a great war; he understood it from the vision.
주님께서 각종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신다고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말을 창조하지 않으시고도 말을 알아듣도록 창조하실 수 있으시다는 건 현대철학 이나 현대심리학의 기초지식으로도 전혀 의심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설명이 가능합니다. 눈에 보이는 비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나 계시 받는 자의 시각화 작용 창조를 통해 주님께서 계시현상을 베푸실 수 있으시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해력도 주님께서 마음의 사랑을 따라 심겨 주시는 로드맵을 가게 하시면 그대로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실 것 입니다. 계시는 온전히 주님의 창조 긍휼베푸심이라고 이해 되어야 옳다는 말씀입니다.
크리스찬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여 저 모든 일에 소망 있음을 주님께 보이고자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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