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 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의미하는 바가 달라질 때가 많습니다. 의미가 달라지는 말의 상황이란, 실상 말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 외에 다름아닙니다. 사람이 사랑이라는 말을 똑 같이 사용한다해도 각 사람이 사랑하여 말하는 바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표현할때 우리는 흔히 Nuance 뉴안스 [한국인들이 익숙한 발음으로는 뉘앙스] 곧 차이를 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언급할때 어떤 정도의 사랑 즉 어떤 이유로 무얼 목적으로 사랑이라 말하는가를 이해하려고 시도합니다. 속이거나 남의 것을 빼앗거나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일에 마음이 있는 장사꾼 도둑놈 사업가의 말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결국 돈이 목적이라는 점을 알고 회피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12 중에 하나였던 요한, 사도 요한은 항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씀 갖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사랑하는 마음씀이 보게한 사랑의 뉘앙스는 요한복음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미를 사랑하는 마음씀으로 듣고자 하여 주님께서 보게 하신 사랑의 뉘앙스를 하나 정리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씀을 갖기 원하는 오늘 우리 크리스찬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께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따라다닐때 그들을 이용 관리 지도하도록 제자들을 세우지 않으셨었고 도리어 그들을 향해 사랑하는 마음씀을 갖도록 말씀하셨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Give them some food yourselves." 마태복음 14:16, 마가복음 6:37, 누가복음 9:13. 요한은 저 말씀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로 충분히 먹게 할 떡을 살수 있겠느냐?" 요한복음 6:5.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알고 빌립에게 하신 저 말씀의 의도는, 요한에 의하면, 사랑의 뉘앙스를 드러나게 하시려는데 있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2)예수님께서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로 그곳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 남자만 5천명 [유대인 5천가족으로 해석될수 있음]이 충분히 먹게 하셨었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찼었다고 말합니다. 물고기와 떡, 마가복음 6:43, 또는 떡, 요한복음 6:13, 어느 것이거나 간에 그 남은 조각은, 요한에 의하면, 한 아이와 안드레를 거쳐 예수님 앞에까지 이른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 이었습니다. 한 가족의 식사로 생각될 수 있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신비한 저녁식사 후 남은 조각 12바구니는 응당 그 본래 출처였던 그 한 가족에게로 돌아갔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3)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워 신비하고 풍족한 삶을 유지하기 바랐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아닌 영생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주리라"하신 말씀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을 하셨었고,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본래의 자기들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요한이 전해줍니다. 요한복음 6:27, 63, 66.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려는 마음씀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바 "인자가 주리라 = 계시"받는 인생이 아니라, 물질사랑하는 마음씀과 다른게 아님을 요한에게 깨달아 보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4)요한은 그 사랑의 뉘앙스를 알아차리게 된 지점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한복음 6:70-71.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재생하여 잠깐 그의 인생을 더 연장시키신 일로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열었을때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가 자기 마음씀을 드러냈었고, 이를 들은 다른 11제자들이 사랑 마음 뉘앙스를 알아차렸다고 말합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 12:6.
(5)5병2어 신비한 저녁식사때 남은 조각 12바구니를 가룟 유다가 어떻게 처리했다는 말인가? 그 아이와 그 가족에게로 그 전부를 돌려 보내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그 전부나 일부를 가룟 유다가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는 말이 아닌가? 예수님께서도 아셨었고, 예수님의 다른 11제자들도 모두 그의 사랑 마음의 뉘앙스를 다 알아 차리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가룟 유다의 사랑 마음씀은 돈이었고, 그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못했고, 할수 없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마태복음 27:4.
(6)요한은 가룟 유다의 마음씀 속에 항상 있는게 돈이며 이를 위한 명분으로 가난한 자들을 말한다는 점을 다른 열 제자들과 함께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사랑 마음씀 속에는 항상 예수님 사랑이 없다는 말씀을 그의 면전에서 예수님께서 하셨었다고 전해 줍니다. "You always have the poor with you, but you do not always have me.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12:8. 마태는 가룟 유다의 마음씀이 결국 예수님 사랑 마음씀을 갖지 못하게 할 것임을 그와 다른 모든 제자들의 면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었다고 전해 줍니다. "The poor you will always have with you;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가난한 자들을 너희가 항상 가질 것이나, 너희가 항상 나를 갖지는 아니할 것이로다." 마태복음 26:11.
(7)마가는 사랑 마음씀으로 가능하고 언제든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사랑과 예수님 사랑의 기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전해 줍니다. "The poor you will always have with you, and whenver you wish you can do good to them,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가난한 자들을 너희가 항상 가질 수 있을 것이니 아무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너희가 나를 항상 함께 할수 있지는 못할 것이라." 마가복음 14:7.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 아시며 허락하시는 일만 벌어집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거나, 자기 욕망 또는 사회적 출세와 성공욕구를 채우기 위한 목적과 책임의식으로, 자기 유익을 위한 해석과 함께 성경구절을 일종의 "유사 계시"처럼 그 "계시 없는 사회정서적 선행"을 다른 크리스찬에게 요구하고 있는 자신을 본 다면, 이러한 크리스찬 목사 선교사 설교자는 가룟 유다의 마음씀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조용히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자는 주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라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7:22-23.
주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없다면 이는 사회적 기업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5:13-16. 이러한 일에 빠져 있다면 마지막 때 예언된 악역으로 허용하고 계시는 바 독수리의 비극에 가까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춰야 할 것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마태복음 24:28. 타인을 이용하는 일을 멈추고,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씀으로 주님께서 계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7:24, 요한복음 6:27.
요한의 사랑 마음씀을 가진 크리스찬은 "계시없는 영성"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계시가 없다면 그 말을 하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며, 그 말을 따르는 크리스찬 또한 속임을 당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인생을 다 아신다 말씀하십니다. 크리스찬에게 직접적인 계시를 주시는 이유는 어떤 일에 이용 당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계시없는 사회적 선행"은 크리스찬을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과 무관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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