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T67 신명기6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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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변증법적 구약해석 [외모에서 중심으로]

신명기6장7절 2020. 11. 25. 05:56

바울에게 갑자기 닥친 예수님의 나타나심 곧 산 하나님의 현재적 계시사건은 바울 스스로가 자신의 서신들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같이 유대교의 율법적 행동주의 또는 유대교 행동주의 믿음론으로부터 기독교의 계시중심적 믿음행동 또는 기독교 개별 믿음론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전회를 갖게 했습니다. 그 핵심은 사람중심의 율법구원론으로부터 하나님중심의 계시구원론으로의 전회입니다. 이는 바울의 계시사건이 현상학적 개체론, 형식적 외모(외식)주의, 더 나아가 이에 근거한 종파주의 또는 율법주의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부정하고, 계시 총체론, 인격적 믿음, 하나님구원론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정초했다는 점에서 기독교 구원론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학적 신앙적 전회를 구약해석에 대한 자신의 태도 변화로 설명하는데, 갈라디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율법 행동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 자비(긍휼)로서만 가능한 계시 구원론에 대한 전적 의지입니다. 단적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3:1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란 종교사회적 기능 즉 일반명령 또는 계명일뿐이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뵙는 개별 계시사건 체험 이후로는 무효화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왜 그렇다는 건지 바울의 욧점을 정리해 봅니다.

 

갈라디아서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였었도다].

 

바울 고백은 유대교 율법주의 또는 현상학적 행동주의에 자신이 경도되어 종파주의의 행태를 갖게 되었었고, 예루살렘 초대기독교회에 대한 자신의 핍박이 바로 그 한 사례였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활세계에 따라 파악되는 사태와 본질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인식태도를 철학적으로 간파한 현상학은 바로 저와같은 개체론적 외모(외식)주의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의 저 고백적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개체론 (Individualism) 또는 개체론적 접근 (Individualistic Approach)에 의한 생활태도가 율법주의, 종파주의, 성경번역어로 외모 (Partiality)라는 표현에 대한 표상적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시사건 체험 후 개체론적 신앙 (Individualistic Faith)을 산 하나님 (Living God)과 무관한 사람의 창작이거나 이를 학습한 결과물에 경도된 삶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씀이며, 이를 쉽게 말하자면 교리, 교리학습, 유대교 행동주의적 믿음 구원론 등은 산 하나님의 개별 계시, 개인 구원의 입장에서 부정되지 않을수 없다는 뜻입니다. 좀더 광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공동체적 정의나 구원교리, 집단 구원이란 있을수 없으며 오직 산 하나님의 자비(긍휼)에 의한 계시 구원 즉 개별 구원만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을 통하여 누구나 산 하나님의 계시사건 체험을 겪고난 후 격지 않을수 없게되는 변증법적 구약해석 즉 구약 율법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전회의 내용을 정리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사건의 개별 명령 또는 언약과 어떤 계시를 바탕으로 표현 일반화된 명령 또는 율법 사이의 구별과 계시사건 체험을 중심으로한 구원론적 구약해석의 전회의 내용이 그 핵심점입니다.

 

갈라디아서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백 삼십년은 창세기 12:1-3, 15:13 출애굽기 12:40를 통해 언급된 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과 약속 즉 계시사건과 모세 율법 제정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가리킵니다. 계시사건은 계시 받게 된 사람과 계시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여러 층의 의미 또는 의도가 존재합니다. 계시를 체험한 사람의 기록 또는 표현은 그 의미들 중 하나의 의도로서 소통할수 있을뿐이기 때문에 율법이란 결코 계시와 동일시될수 없습니다. 이 율법을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하게 된다면, 계시사건 체험 이전의 모든 크리스찬의 경우가 다 이에 해당하겠지만 강한 집착 또는 경도된 신앙태도를 가질경우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개체론적 율법주의 종파주의의 외모지상론자의 길에서 헤어나올수 없습니다. 율법 또는 계명을 일반화하여 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신앙생활은 이런 점에서 구원과는 무관한 사회적 종교인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겠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개별 계시명령과 모세를 통해 주신 일반명령 또는 계명의 차이점을 주목한 후, 갈라디아서 3:16에서 아브라함의 개별 계시명령 곧 약속이 히브리어 집합단수로 표현된 창세기 12:7, 15:18, 22:17-18 본문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로 나타나게 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취시키셨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부터 구약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지 않을수 없다는 점을 갈라디아서 3:10, 13에서 밝힙니다.

 

신명기 21: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3:13에서 바울은 저 말씀에 따라 곧 일반명령, 계명, 율법, 또는 현상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무십자가에 달리셨었으니 저주 받으셨다고 말해져야 하나, 실상은 우리 크리스찬을 율법적 틀 곧 율법적 행동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뭔 말이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율법 전체를 실상 무효화 시키셨고, 그분이 바로 산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 근거는 이사야 45:13 내가 의로 그를 일으[켰도다] 곧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한 현상적 판단 또는 외모(외식)주의자의 비난을 부정토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약 또는 율법해석이 변증법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첫 신앙의 단계에서 율법적 태도는 절차적 입문과 같지만, 그 본령인 산 하나님을 뵙는 계시사건 체험이 앞선 신앙관을 부정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0에서 유대교 율법에 대한 행동주의적 해석과 이를 받아들이고 경도되어 산다면 이는 실상 저주받은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근본적인 덫을 갖게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바울이 구약과 율법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뿐만 아니라 율법적 현상적 행동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언급을 갈라디아서 3:11에서 강하게 하는 이유는 생활세계적 불가능성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성경과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바울의 외모에서 중심으로의 신학적 신앙적 전회는 산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나타나심 곧 계시사건 체험 후 각 크리스찬에게 벌어지게 되는 종래의 교리적 믿음과 계시 믿음 사이의 인식적 차이, 일반계명과 개별계명 사이의 차이를 정리 이해 및 증인의 삶을 살아 나갈때에 필연적인 전회로서 동의될 내용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