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T67 신명기6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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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바꿔 주시는 하나님 [신 23:24-25]

신명기6장7절 2019. 1. 2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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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큰 교회만을 찾아 자기 유익의 기회를 가지려는 의도에서 등록하는 교인들이 많은 요즘의 한국인들 말고, 자기 한계상황을 인식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의탁하며 그분의 뜻을 알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양심을 철저히 하나님중심으로 바꾸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자기 양심을 바꿔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찬 설교자는 명목상의 크리스찬 양심과 성경적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말해야만 합니다.

 

     한국교회는 오랜 세월 유교전통적 양심을 그대로 전제한채 성경을 읽고 설교하므로서 성경적 양심에 대해 낮선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명기 23장에 등장하는 성경적 양심 Biblical Consciousness 구절을 성경적 생활세계 수준으로까지 연결짓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3:24-25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찌니라."

 

     포도원은 상징적으로 유대 즉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경을 지시한다는 뜻에서 보자면, 한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생활세계에 속한 양심을 창조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구절입니다. 포도원을 소유한 자와 일군, 곡식밭을 소유한 자와 일군 또는 소유가 없는 사람, 이 양자 사이에 마음씀이 어떠해야 편안한지를 나타내는 말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각 달리 형성되는) 양심 Consciousness이라는 말입니다. 크리스찬이 이러한 양심을 하나님께로부터 교정받는 일은 자기 생활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는 변화를 함축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표현하는 게 정확할 이 일을 성경을 통해 주님의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룻기 2:15-16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베들레헴, 예루살렘 지경의 사람 보아스! 이방여인이면서 유대인의 아내로 살았었고 유대인의 양심을 갖고 살기를 원하는 룻에게 보아스는 성경적 양심이 작동하는 생활세계를 열어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성경적 양심 Biblical Consciousness을 세속적으로 고귀한 사랑얘기의 한 모티브로 삼아 설교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크리스찬으로서 조차 자격미달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셈이죠! 보아스가 살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심어 주시려는 저 성경적 양심이 흔치 않았다면, 유대인들 사이에서조차 짐승의 속임에 의한 타락한 양심을 그대로 받아 사는 이 세상의 비극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신명기 23:24-25을 통해 새로운 양심을 갖게 된 크리스찬은, 자기가 소유하거나 운영하고 있는 상점에서 판매용 빵을 뜯어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사람 앞에 당황스럽겠으나 결코 그 일을 도덕적 또는 법적 범죄로서 볼 수 없고, 도리어 그의 처지에 대한 동정함 때문에 돕고자 하는 마음씀을 주님 바라봄으로부터 알게 되기를 바랄 것 입니다.

 

     필자는 미국 뉴욕에 살면서 맨하탄에서 벌어지는 저와같은 상황에 잘못 대처하여 그 빵 한 봉지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었다는 한인들 소식을 종종 들은바 있습니다. 빵 한봉지 때문에 또는 모자 하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지요? 성경적 양심을 받은 사람은 실상 자기 상점에서 먹거나 혹 이에서 더 나아가 새 빵 봉지를 들고 도망친다하여, 성경에 써 있는 것처럼 먹는건 괜찮지만 그걸 가져가는 건 않되잖아? 이렇게 어리석은 소리를 하게 되지는 않을 것 입니다.

 

     문자적으로 자기의 양심을 하나님께서 성경적 양심으로 바꿔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인격없는 명목상 크리스찬,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체험을 하지 못해 보고, 어떤 인격이 생길 수 있을까요? 크리스찬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뵙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실상 자기 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씀을 관찰하고 계시다는 점을 알게 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시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마태복음 12:1-2, 7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크리스찬은 하나님께서 자기 양심을 바꿔 주시기를 바라며, 그 일을 통해 인격이 변하고 생활세계를 바라보는 관찰력과 그에 대한 해석적 마음씀이 사랑 곧 인간에 대한 동정심과 인간의 존엄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사실을 통해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말라기 3:16-18. 이런 크리스찬 만이 요한복음 14:21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농민들도 종종 농사지은 작물들을 갈아엎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과연 한국에 크리스찬설교자는 없는가? 돈이 성경적 양심보다 중요한 명목상 크리스찬뿐인가? 뉴스거리 제공인물이 되기 위해 자기것도 아닌 모금한 것들 앞에서 얼굴을 내밀고 스스로 선행이라 이름붙이는 자들은 과연 명목상 크리스찬으로서 만족한단 말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양심 바꾸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경고가 아무렇지 않단 말인가? 마태복음 13:14-15, 이사야 6:9-10. 성경적 양심을 창조해 넣어 주심 받기 원하는 크리스찬으로 변화되는 복된 일이 한국에서 벌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