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T67 신명기6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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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크리스찬의 의미 [바울의 크리스찬상]

신명기6장7절 2018. 12. 19. 05:03

 

바울이 바나바의 손을 잡고 안디옥에서 성경공부 일년 프로그램을 통해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의 사회문화적인 상 A Socio-Cultural Image of Christians 을 갖게 했다는 점과 바울 자신이 산 하나님을 뵌 후 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주님의 말씀의미를 깨닫고 전하고자 하는 주 성령님의 일생 프로그램 체험을 통한 크리스찬의 총체론적 상 A Holistic Image of Christians 사이에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주의를 주신바와 같이 "밀집과 밀 [한국어 번역, 겨와 밀]" 사이 만큼이나 근본적으로 비교조차 불가능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6, 고린도전서 2:15-16, 예레미야 23:28.

 

     살아계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해 사는 인생이 후자에 속한다면, 그 모습을 보며 따라가 보고자 하는 인생이 전자에 속하겠죠! 후자는 사람이 임의로 또는 의도적으로나 결단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니, 결국은 전자의 모습으로 크리스찬상을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체험해 나가는 삶에 의미가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현실적 과정적 의미로는 대체로 전자의 단계를 통과하며 그 문제점을 인식한 후 후자의 신비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전 인생을 걸게 될때 소망있는 크리스찬의 길에 있게 됩니다. 이 때 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람의 사랑을 보시고 스스로를 나타내 주신다면 바울처럼 체험적 고백을 하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크리스찬의 껍떼기와 같은 사회문화적인 상을 벗고 총체론적인 크리스찬의 상을 보기까지 주 성령님의 지도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가는 일에 대한 바울의 체험적 고백을 살펴봅니다.

 

고린도전서 2:15-16 "신령한 [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판단 [할 수 있으]나 자기는 아무 [의] 에게도 판단 받지 [에도 의존치]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 [상담하] 겠느냐 그러나 우리 [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1)'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할수 있다'는 표현에는 전거가 있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 뵙게 되기 까지 기다리며, 자신의 꿈, 자신의 의지, 자신의 결단으로 뭔가를 결정하며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의 소망이 있는 것이죠! 영적 = 주님 뵙는 신비체험의 사람. 이 단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씀은 그 사람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직 주신 말씀대로만 하나님 바라보며 살아가며 그 일로서만 생각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30:18-19, 요한복음 21:22.

 

     만약 영적인 이라는 전거를 간과한채 해석 설교하는 자가 있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해 "시기와 분쟁"이 있는 그 이유가 바로 저 사회문화적인 자기꿈을 향한 물리적 관점 때문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모른채 도리어 시기와 분쟁 조장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보통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꿈과 계획에 따라 부지런히 살아나갑니다. 겨울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학교 등교시간, 직장 출근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자동차와 학생 학부모가 빠른 눈치로 서로를 교차해 나가는 광경을 봅니다. 마음이 번잡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물리적 상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 이 사람을 통제할때 사회문화적인 상에 의한 시기와 분쟁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문화적 크리스찬상의 허약성이 드러납니다.

 

     부지런을 떨어도 여유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꿈과 사회문화적인 상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여유는 오직 시기와 분쟁에서 승자가 되었을 때 뿐이라 여겨질 것 입니다. 억세고 거칠게 사는 일에 대해 필요악이라는 잘못된 학술적 합리화로 점점 무장되어 사실은 자승자박합니다. 산 하나님을 믿어, 산 사회문화적 정서를 믿어? 뭐가 더 힘이 센거야, 너 한테는? 진정한 평안이 아닌것 아시죠? 언제 뒤 통수 맞게 될지 모르죠? 이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3.

 

     바울이 '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는 뜻은, 이러므로 하나님의 현재적 뜻을 바라보는 크리스찬 일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현상을 판단합니다. 사회 문화 법 그 어느 측면이든 간에, 그 현상 배후를 봅니다. 시기와 분쟁의 현장에서 맞닥뜨린 그 사람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이라는 사실에 눈뜨고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라는 함축이 있는 말씀임을 알겠죠! 누가 이 말씀을 받습니까? 사람의 의지로도 합리적인 계산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이런 도덕적인 사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부지런을 떤 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바울 자신 처럼 살게 된 하나님을 뵌 사람에게 말하는 것 입니다.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입니다.

 

     (2)'영적인 자는 아무의 판단에도 의존치 않는다'는 표현은 앞서서 언급한 부지런을 떠는 방법과 연관된 말씀으로 주목하게 합니다. 시기와 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부지런 떠는 물리적 흐름을 말하는 게 전혀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의미를 파악하여, 자기에게 이미 주신 말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기 위한 부지런함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탁하려면 하나님의 현재적인 뜻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앞서서 예로든 걸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학교앞 횡단보도에서 누군가, 그것이 자동차이거나 사람 또는 학생이거나 간에, 양보도 질서도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물리적 흐름을 생각하면 정해진 시간에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있기 위해 힘써서 몸을 움직이는 일 말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지거나 따지려는 시늉 즉 사회법규적 협박을 통해 힘 센 놈이 승자인 생활세계를 만들것인지, 한 발 물러나 사정을 살피며 여유를 가질 것인지?

 

     영적인 자라도, 즉 하나님을 뵌 크리스찬일지라도 부지런을 떨지 않았을 경우 그 시비와 분쟁에 휘말리는 사회문화적인 존재 중 일부에 속하는 일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과 상관 없이 몸이 이미 움직이는 걸 목격하게 될 뿐입니다. 이미 이런 자신을 발견하면, 시기와 분쟁에서 힘써서 이기려고 질서와 양보를 따져가며 물리적 흐름 안에 머물러 있게 되겠죠! 아니면, 한 발짝 물러나 한 숨 쉬는 사이 물리적 흐름 밖에 즉 지각생 입장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자로서 부지런을 떤 후 여유 있는 삶을 살지 못 한다면, 시기와 분쟁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리적인 흐름에 의존하는 사회문화적인 크리스찬상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만다는 게 지금 바울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3)'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상담하겠느냐?' 누구입니까? 이 말씀 오해하면 큰일 나겠죠? 설교자도 학자도 어느 피조물도 저 문장의 "누가"의 자리에 절대 올 수 없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3:10. 상담 Counseling 의 특징은 상담자 Counseler 도 내담자 Client 도 평등한 위치에 있으며, 그래야만 삼위일체하나님상의 설명에서 전제하고 있듯이 인격 Person이 전제되므로, 어느 누구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함께 진상을 바라보게 되는 현장을 공유한다는 점을 주목한 말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사랑하는 자에게 스스로를 타나태 주시면, 주 성령님께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비전 말씀 등의 형식으로 함께 공유하게 되는 신비체험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21. 이런 점을 전제하신 말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듯이 보혜사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 이후에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마음, 우리 주 하나님의 마음을 크리스찬중 인정받은 자에게 나타나 알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4)'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바울의 이 말씀은 사회문화적인 크리스찬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라는 뜻이요, 이미 하나님을 뵌 크리스찬에게는 하나님뜻에 대한 끊임없는 현실적 반응을 위한 부지런함 즉 하나님 바라봄을 촉구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을 떤 후, 여유 있게 살아! 이게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시기와 분쟁에 휩싸이지 않고 도리어 현재적인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갈 수 있는 방법이야! 물리적인 흐름에 빠지지 말고, 영적인 흐름을 따라 주 하나님을 바라봐! 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중이라는 사실 잊지않고 또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일에 빠지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일은, 부지런 떤 후 여유 있게 주님의 현재적인 통치현실을 통해 그 뜻을 찾아 서거나 가거나 판단하며 하나님께 의존된 삶을 사는 걸 의미합니다.